[봉천]독립서적, 독립여행 <퇴근길 여행 한 컵>

에디터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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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 여행마을



15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게 부러웠다. 사회에서 이제 막 출발선을 넘긴 나의 눈에는 그 긴 시간을 통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가끔은 네비게이션도, 신호등도 없는 길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미래가 막연하게 느껴진다. 누구에게 묻는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살아보지 못한 공간과 겪어보지 못한 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은 알고 있다. 여행. 20년짜리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 서울에서 단기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취향 폴더를 만들어 드립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보편적 연어(왼쪽)와 정수기 생수통을 작게 줄인 물병(오른쪽)


지하철 2호선의 신림, 봉천, 낙성대는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처음 정착하는 지역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봉천동은 젊은 직장인이 많다. 그래서인지 ‘보편적 연어’, ‘원기옥’처럼 길거리에 보이는 가게 이름도 남다르고, 물병 하나에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봉천동은 새로운 시작과 앞으로 잘 될 거라는 희망이 잘 어울리는, 베이스캠프 같은 동네다.



여행전문 서점 ‘여행마을’을 방문한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다. 어디로 떠날지 결정하는 그 처음을 함께하는 공간은 봉천동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책들이 모두 생소했다. 대형서점에 흔히 있는 ‘여행 베스트셀러’는 찾기 힘들었다. 여행마을 이장 정지혜 대표의 말에 의하면 서점에 있는 여행책 중 80%가 독립서적이라고.

  

유럽성지술례, 망한 여행사진집 등 위트있는 타이틀과 키치한 기획이 눈을 사로잡는다


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대형서점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콘셉트의 책들이 많았다. 유명한 여행작가는 아니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몇몇 책은 제목만 봐도 피식 웃음이 났다. 종이 너머에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그 여행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낸 사람이.



사람의 흔적은 책 표지, 공간의 소품 하나에서도 보였다. 책 하나하나 설명을 붙여 놓은 메모 에서부터, 보라카이에서 가져온 우쿨렐레, 피렌체 가면축제에서 샀던 가면, 한쪽 벽면에 붙여진 쪽지들까지.





정지혜 대표가 여행지에서 가져온 물건과 손님들이 그에게 남긴 말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많은 여행 이야기를 알고 있을 그에게서 새로운 여행지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다’고. 이렇게 막막할 땐 어디를 가야 할까. 그에게 사회초년생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물었다.

  


직장에 다니던 시기, 주말에 뭐했냐는 부장님의 질문에도 그는 말을 잃었다. 집에서 쉬었다고 답하면 ‘그럴 바엔 회사에 나와서 일하지’라는 핀잔을 들었고, 친구를 만났다고 답하면 ‘그렇게 놀고 나서 일을 어떻게 하려고 하냐’는 질책을 들었으니까. 설상가상, 힘들어하는 그에게 주변 어른의 반응은 모질었다. 모두가 참고 산다고, 별 수 있냐고.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 참고 지냈더니 몸에서 신호가 왔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지친 것이다.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는 병원치료도 받았지만 당시에 접했던 독립서적들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경계 없이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보니 자신과 닮은 책을 만나서 깊이 교감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까지 책을 통해 만났다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것도 다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독립서적 읽기는 ‘여행’에 가깝지 않았을까. 가보지 못한 공간과 살아본 적 없는 시간을 경험한다는 건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같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여길 언제 또 와보겠어’라며 기념사진에 몰두하는 여행자나, ‘이것도 다 추억이지’라며 불쾌한 경험도 즐기는 여행자나. 지금, 여기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경험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경험을 모두와 공유하기 위해 여행마을에서는 ‘4주 글쓰기 모임’, ‘5주 만에 한컴으로 책 만들기’ 프로그램이 매월 진행된다. 여행책을 읽는 소비자에서 직접 책을 만드는 제작자, 창작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여행마을은 아무리 독특한 여행경험을 공유해도 모두가 귀기울여 들어주고 공감해줄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그래서, 평소의 나라면 절대 가지 않을 장소로 떠나기로 했다. 누가 비행기 티켓을 준다고 해도 고개를 저을만한 곳. 종교도 없고, 운동은 더더욱 안하고, 지루한 건 못 견디는 나를 800km짜리 걷기 코스에 던져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앞길은 여전히 막연하지만 다시는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올 것이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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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