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나를 증명하는 시간 <퇴근길 여행 한 컵>

에디터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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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 | 사진책방 고래古來




블록체인, AI, YouTube… 나를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모두 따라잡거나 사용하기는 버겁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지구가 뒤집어져도 끄떡없는 나만의 무기를 단단히 쥐고 싶다. 이를테면 태도, 관점 같은 것들. 그렇게 시작된 작은 여행은 런던을 지나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도착했다

*런던의 시간이 쌓인 곳에서 이어집니다.

 

흙과 기와로 지어진 건물, 한복 입은 사람들, 한글 필기체로 쓰인 스타벅스 간판.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리자 시간을 거꾸로 돌린 기분이었다. 똑같은 서울이지만 옛날 같고, 일상이지만 일탈 같은. 여행은 이렇게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시작된다.

조금 더 천천히 즐기기 위해 대림미술관과 통인시장을 지나 인적이 드문 청운동을 찾았다. 마을버스처럼 시간이 유유히 흐르는 동네인만큼 스스로에게 긴 호흡을 불어넣기 적당한 공간을 봐 두었다. 이름부터 긴 세월을 담고 있는 사진책방, 고래古來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보정하는 시대에 사진집의 존재감은 미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진가는 아마추어와 확연히 구별되는 개성을 요구받지 않을까. 누가 봐도 ‘이 사람 작품이다’고 할 만한 스타일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만의 것을 배우는 데에는 사진이 좋을 것 같았다. 자신만의 태도를 오래 유지한 사람을 찾는다면. 쌓여있는 시간을 기대하며 책방의 문을 열었다.

  


류가헌 갤러리 지하 1층에 자리잡은 고래는 6평 남짓한 규모로, 어릴 적 동네 책방을 떠오르게 만든다. 어디든 털썩 앉아서 하염없이 책을 봐도 좋은 아늑한 공간. 한 권을 집어 커버를 넘기면 이 곳에 어떤 마음이 담겨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진집 특성상 훼손되면 판매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꽁꽁 싸져 있던 포장을 벗겨 샘플책을 만들었다. 책을 사려면 안에 어떤 사진들이 있는지 충분히 감상하라는 배려다.



Made In North Korea, 자영업자, From Miami To Los Angeles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가보지 못한 장소, 살아보지 못한 시간의 이야기를 담은 사진집들이다. 여행자가 가장 탐내는 시선이다

  

흥미로운 책들이 많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사진집 구매경험이 고작 1회인 문외한이니, 추천을 받기로 했다. 책방 한가운데 아카시아 나무 테이블에 앉았다. 무려 8명이 앉을 자리다. 이 공간에 넣기엔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지만, 사진을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자리이자 책방지기의 손님 응대 공간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내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은 좀 의외였다. 한영수: 서울, 모던 타임스. 헐벗고 궁핍한 이미지만 남아있던 50-60년대에, 프레임 속 맞춤정장을 입고 거리를 걷는 모던한 활력이 신선했다. 한영수 작가는 당시에도 지금과 비슷한 류의 삶이 있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우리는 더 높은 해상도로 과거를 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한 사람의 태도는 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지문이자, 나아가 사회의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태도는 줄곧 ‘재미있는 일을 하자’였다. 재미없는 일은 열심히 해봤자 간신히 남들 따라가는 수준에서 멈췄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않았다(국사 공부가 싫어서 아직도 사극을 안 본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나의 100퍼센트를 쏟아부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골목길 풍경 전집>, 김기찬


김기찬 작가는 33년(1968-2001) 동안 중림동 구석구석을 다니며 골목길 사진을 찍었다. 나에겐 잘못들었나 싶어 동네 이름을 되물을 정도로 생소한 곳이지만, 그에겐 오랜 시간 좇아다닐 가치가 있는 장소다. <골목 안 풍경 전집>은 사라져가는 골목 안 공동체에 주목하고 꼼꼼히 기록한, 그 가치의 증거다. 30년 동안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가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낼 만큼.

매번 새로운 것만 찾는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긴 시간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아야 한다. 지루하게 느껴져도 낯선 시선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마냥 좋다며 바짝 열심히 하는 것과 무언가 하나를 붙잡고 꾸준히 결과물로 구현하는 일 중 무엇이 나를 증명해줄지는 명백하다. 시간이 쌓일수록 고민은 깊어지고 기획은 뾰족해지고 기술은 늘어난다고 믿는다. 우선 지금 하는 일을 꾸준히 밀고나가기로 했다. 이 여정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시작이 어디가 될지는 분명해졌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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