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동네를 만드는 작은 가게 <21세기 공장장>

에디터 진성훈
2018-12-12

뉴트로 거리 | 상수와 합정 사이




골목을 걷는 재미는 작은 가게에서 나온다. 작지만 정체성이 뚜렷한 가게는 동네의 분위기를 만들고, 주변에 다른 가게가 자리잡도록 이끈다. 이들이 모여 생긴 다채로움을 눈에 담는 즐거움이야말로 도시인의 특권이다. 주목 받으면 분위기가 변하는 동네와 달리 여전히 눈이 즐거운 곳, 이른바 뉴트로 거리를 찾았다


불과 2, 3년 전까지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의 거리는 다른 동네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았다. 연남동, 상수동, 망원동이 차례로 주목 받으며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동안 당인동만 이렇다 할 변화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당인동은 벽돌 구조 건물을 유지하며 특유의 동네 분위기를 유지하게 됐다.
이러한 벽돌 구조 건물은 주로 1970년 「도시 기본계획 조정」 이후에 지어졌다. 기존 건물을 헐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건물을 세우는 소위 ‘뜨는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그라피티, 미용실, 디자인 스튜디오, 빈티지 옷집 등 외관 구경만으로도 호기심이 자극된다. 이렇게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가게와 동네­의 옛 정취가 남은 건물을 동시에 눈에 담는 호사를 누리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당인동에는 아직 골목골목을 산책하는 재미가 남아있다.



이 일대에 책방이 몰리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2017년, 아나운서 오상진ㆍ김소영 부부는 자주 산책하던 길목에 ‘당인리 책 발전소’를 오픈했다. 1930년 건립한 서울 화력발전소(구 당인리발전소) 인근이다. 산책하기 좋은 분위기는 이렇게 ‘발전소’하면 떠오르는 더러움, 위험함 등의 이미지마저 바꾸어놓는 힘을 가졌다. 공간의 정체성을 과거에서 끌어와(Retro) 현대적인 방식(New)으로 전개하는 것. 뉴트로(Newtro)의 정석이다.



아울러 2014년에 오픈한 북카페 ‘빨간책방’도 영화 평론가이자 라디오DJ로 활동하는 이동진의 인기에 힘입어 상수역과 합정역 사이 대로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책을 소개하는 1인 미디어 <책읽찌라>의 북카페 ‘찌라살롱’도 2018년 빨간책방 인근에 들어섰다.
이를 단순히 책 파는 공간의 증가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최근 책방에서는 명성 있는 저자의 북토크, 전문가의 강연, 펜드로잉이나 독립출판 등 창작관련 워크숍 등이 일주일에 2, 3회씩 이루어진다. 책만 사고 떠나는 공간이 아닌 경험이 모이는 공간으로서의 책방은 취향과 지식이 모이는 커뮤니티로 진화하고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위), 책읽찌라의 찌라살롱(아래)


디지털은 모두에게 공유되지만 오프라인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제공한다. 온라인 기반의 팬덤을 구축한 1인 미디어가, 오프라인에서 자신만의 콘텐츠 생산에 일종의 21세기형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유다. 책방은 상수역과 합정역 사이를 아우르는 ‘오래된 미래’다.

반면, 랜드마크이자 터줏대감 역할을 하는 카페도 있다. 이름부터 무연탄을 의미하는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는, 낡은 신발공장을 개조해 만든 인테리어와 1910년산 로스팅 기계가 특징적이다. 실내는 뚫려있는 벽을 그대로 드러내며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살리면서, 칸막이 없이 열린 소통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폐허가 된 공장지대를 리모델링한 부다페스트의 루인 카페(Ruin Cafe)와 비슷한 모습이다.



아울러 제비다방은 시인 '이상'이 1930년 종로에서 운영했던 다방을 계승한 카페다. 예술가의 모임공간을 계승한 곳답게, 밤에는 ‘취한제비’로 간판을 바꿔 달고 인디 뮤지션의 공연장으로 변한다. 이 두 공간은 각각 2011년과 2012년 시작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과거는 뜨기 위한 콘셉트나 순간적인 감성이 아니다. 오랫동안 이어갈만한 가치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발전소가 책방으로, 다방이 공연장으로, 공장은 카페로 변신했다. 이렇듯 상수역과 합정역 사이에는 유행에 짜맞춘 인테리어보다 과거의 정신을 현재에 맞게 풀어내는 공간이 도드라진다. 외부의 검열없이 자신만의 개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멋이라고 한다면, 이 일대를 멋지다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다.
걸음을 뗄 때마다 21세기의 공장장을 만나는 곳, 이곳은 뉴트로 거리다.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