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공장 옆집의 예술가

에디터 진성훈
2019-08-21

문래동 프롤로그


“열정과 휴식 중 하나만 택하라면요?” TV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유재석이 문래동 시민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무엇이라고 답하든 그 뒤에 숨겨진 삶은 다르지 않았다. 땀 흘리며 밤늦게까지 집중하는 아버지를 보고 철공소 사장이 된 20대에게도, 돈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예술가에게도 문래동은 열정을 불태우는 장소다.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몰린 동네에서는 돈 냄새보다 땀 냄새가 더 매력적이다.



문래동의 지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방적기계인 ‘물레’의 발음을 살려 동네 이름을 문래라고 지었다는 설과, ‘문익점의 목화 전래’를 줄여 지었다는 설이다. 어느 쪽이 맞든 당시 동네를 먹여 살린 섬유 산업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같다. 늪지대였던 문래동에 마을이 조성된 계기가 1930년대에 방직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것이다. 이 시기의 문래동은 ‘사옥동’(絲屋洞)으로 불렸지만, 광복 후 2차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해낸 섬유 산업이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이름을 몸에 걸쳤다고 할 수 있다.


 

물레나 섬유보다 조금 더 친숙한 문래동 철공소 골목은 1960년대 청계천 등지에서 이전한 철공소들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형성되었다. 1970~80년대에 제조업계의 호황으로 문래동 철공소 골목 또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0년대 이후 제조업 불황과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철공소 골목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자연히 인구 유입이 감소하며 동네가 활기를 잃어가던 2000년대에, 청년 예술가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철공소 골목에 모였다. 젊은 예술가는 시멘트벽을 캔버스 삼아 벽화를 그렸고, 철공소 옆에 저들만의 조그마한 갤러리와 가죽공방 등을 차렸다. 서울시문화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문래동에 활동 중인 작가는 약 350~400명가량으로 대부분 작업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공연단원들의 연습실도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문래동은 노쇠한 생계의 현장에서 예술촌으로 변해가고 있다. 마치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였던 베를린이 ‘Squat 운동’(1990년대에 시작된 예술가들의 건물 점거 운동) 이후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지금은 가장 힙한 도시로 유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홍대를 떠나 문래로 건너 온 디자인 공동체 문래예술공단을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문래동은 벽화를 그리는 화가 외에도 사진가, 플로리스트, 가죽공예가, 시인 등 다양한 소양을 가진 예술가들의 터전이다. 이들은 문래예술창작촌에 ‘문래캠퍼스’라는 강좌 프로그램을 열어 이색적인 예술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도자기 만들기, 가죽공예, 목공예 등 전문적인 공간에 가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또 2013년부터 시작해 매회 개최한 ‘헬로우문래’는 지역 자원을 활용해 지역경제를 살리고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경제의 취지를 살린 문래동 대표 예술축제다. 작가에게 직접 배우며 나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보는 ‘주민참여형 워크숍’도 운영된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2019 문래창작촌 지원사업 MEET'를 주최해 문래창작촌의 예술인을 매개로 지역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노력도 하고 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이 사업은 회화, 설치, 연극, 음악, 지역축제와 같은 다양한 예술 장르의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문래동의 특성을 활용한 프로젝트도 전시된다.



물론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 지상부 1층이 자리한 공장들에 철공소나 철재·철강 상가 등 철재 관련 업체가 많아 소음이 들리거나 분진이 날리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이방인의 방문이나 구경을 전제로 구획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렌디한 공간은 어떻게든 발붙일 곳을 찾아낸다. 오히려 험한 지역일수록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며 창의적인 방식으로 자생한다. 갤러리가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아츠스테이)나 매달 꽃다발, 소이캔들, 티컵플라워 만들기 등 다양한 일일 강좌를 진행하는 꽃 공방(라이드 앤 타이드) 등 소위 젊은 감각을 가진 공간들은 구석구석 용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거시적인 변화도 있다. 서울시는 지난 15일 ‘영등포‧경인로 일대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을 발표했다. 문래동 일대 약 51만㎡에 대한 도시재생을 본격 추진, 서남권 경제중심지로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일대를 제조업과 문화예술산업이 어우러진 창업‧일자리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청년 소공인과 예술가가 임대료 상승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1000개까지 마련할 계획이다. 동네가 변하기 위해선 이와 같이 개인이 모여 찍은 점과 두꺼운 붓을 크게 휘둘러 선을 그리는 공공기관의 계획이 동시에 필요할 것이다.
문래동은 전통적인 산업 단지에서 시작해 예술인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이후 소상공인이 자리를 잡아 동네의 경제를 지탱하는 수순을 밟아 왔다. 섬유산업에서 철강소를 거쳐 창작촌의 옷을 입으려 하는 지금이야말로 문래동에 가장 험난하면서도 재미있는 순간일지 모른다. 날것의 열정이 쌕쌕거리며 숨 쉬는 현장을 관찰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