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고양이의 선물 <퇴근길 여행 한 컵>

에디터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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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 | 이화중심


낯선 곳을 혼자 여행하다 보면, 길을 알려주는 친절함에도 크게 감동하게 된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혼자라고 느낄 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 아닐까. 직장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긴 여정을 떠나는 사회초년생에게도,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동료, 어떤 팀장을 만날지는 대개 운에 맡겨진다. 어차피 운이라면, 아예 새로운 공간에 나를 던져보면 어떨까. 당장 직장을 바꿀 순 없어도, 퇴근길에 떠난 여행은 좋은 인연을 선물해줄지도 모른다


*기와집 옆 스페인에서 이어집니다.

혜화역에서 걸어서 15분. 버스가 다닐 수 없는 언덕과 계단. 이화동은 서울의 이름 있는 동네 중 유독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올라가는 동안 프랜차이즈 가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택도, 가게도 2층 높이의 기와지붕 흙벽돌집이었다. 1958년에 조성된 근대주택단지의 흔적이자, 이화동만의 특징이다.



동숭동 옆에 있지만 접근성이 낮기 때문에 이화동에 자리한 공간은 각자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화중심은 독특하게도 손님에게 그림도구를 주며 마음껏 그리고 시간을 보내라고 권하는 공간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 그리는 곳인 셈이다.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공간이나, 눈치 보면서 적당히 자리를 떠야 하는 공간과는 다른 접근이다.



실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님들이 그린 고양이 그림이 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귀여운 표정의 그림부터, 내공이 남달라 보이는 그림, 관광객이 그린 다양한 종의 고양이까지 모두 달랐다. 그렇게 공간 곳곳을 감싸고 있는 그림을 보고 나니 이화중심에 다녀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양이를 그렸을지, 그 시간이 보이는 듯 했다.



음료를 받아 테이블에 앉자, 이화동을 찍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민의 눈으로 찍은 벽화마을과 낙산공원 사진 등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그저 벽화마을이라고 생각헀던 이화동이 사람이 사는 동네로,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런 공간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번화가 대신 굳이 이화동에 자리잡고, 그림도구까지 줘가며 사람들을 오래 머물게 하고, 동네 사진을 인테리어로 걸어놓는 사람. 이화동에 대한 애착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 아닐까.

김영기 대표는 이화중심을 운영하기 전 대학로에서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제공하는 사업을 했다. 이화중심의 그림체험이나 사진이 걸려있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는 이화동을 ‘동네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접근성이 낮아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화동 역시 관광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많지는 않아도 관광소품을 파는 가게와 게스트하우스가 드문드문 보이는 지역이니까. 벽화마을로 이름이 알려진 뒤 주민들이 생활의 불편을 호소하며 일부 벽화를 지운 사례도 있다. 이화동을 찾는 발길이 늘어날수록 상인과 주민의 입장차이가 갈린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줄이기 위해 김영기 대표는 ‘한끼식사’라는 이름으로 동네주민들과 상인이 함께 밥을 먹는 일종의 반상회를 주최한다. 또한 주민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플리마켓, 각종 체험행사를 기획하며 상인과 방문객, 주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려는 다양한 시도들도 이어오고 있다.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는 단기간에 풀리지 않는다. 회의가 아닌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찌 보면 올바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그는 시간이 쌓여서 분위기를 만든다고 믿는 게 아닐까. 이화중심에서 제공하는 그림그리기 체험 역시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회전율을 낮추는 방법이지만,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손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 모여 만들어낸 분위기는 어떤 소품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인테리어가 된다.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거나,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시간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을지는 몰라도.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같은 직장에 있어도 막내의 입장과, 팀장의 입장은 모두 다르다. 심지어 누구를 만나는지도 운에 좌우된다. 하지만 그 이후의 관계는 어느 정도 나에게 달려있기도 하다. 누군가를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으로 판단해버릴지, ‘적어도 배울 점이 하나는 있는 사람’으로 바라볼지는 내 선택이니까.

직장생활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일단 살아보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 도시의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고 불편한 점까지 받아들이기 위해 ‘한 달 살기’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과 맞춰가는 시간도 조금은 길게 잡을 필요가 있다.






퇴사할 수도, 이대로 지낼 수도 없어서 시작한 퇴근길 여행은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까지는 어딘가로 떠나서 답을 찾으려 했다면, 이제부턴 내가 있는 공간에서 답을 찾는 시도를 하려는 거니까. 해보지 않았으니까. 일상이 처음처럼 느껴진다면 그 순간을 여행으로 부르자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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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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