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시간이 없어서 떠나기로 했다 <퇴근길 여행 한 컵>

에디터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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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 | Hey there



베를린, 파타고니아, 포카라, 샌프란시스코.. 구글맵에 저장된 별을 보고 있으면 여기를 언제 다 가보나 싶다. 돈은 어떻게든 모은다고 해도,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유행 따라하듯 무작정 사표를 던질 자신은 없다. 잠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에 잠깐 런던에 다녀올 수 있다면? 서울에서도 여행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을까 하는 작은 호기심이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이 글은 나처럼 시간이 없는 직장인을 위한 일상 속 작은 여행기다



서울 안에서도 다른 도시를 느낄 수 있는 장소는 곳곳에 숨어있다. 파리 테마카페, 쿠바 스타일 펍 등등.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잠깐 기분 내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 공간에 가는 것만으로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리는 없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힙스터 따라하기도, 일탈도 아니다. 언젠가부터 생겨난 불안을 없앨 방법을 찾고 싶다. 이 막연한 불안은 어디서 왔을까.

학생 시절엔 소속이 나를 증명했다. 누구를 만나도 자기소개는 전공과 학교를 빙빙 맴돌았으니 어떻게 보면 쉬웠다. 나를 증명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 건 사회초년생이 된 이후였다. 직장이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대는 끝났고, 지금 나에겐 내세울만한 경력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니 성장에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 초년생의 월급에는 지금 가진 능력보다 미래의 성과에 대한 기대가 더 크게 반영되어 있으니까. 성장하지 못하면 내일 당장 회사를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성과를 낸 적이 없으니 갈 곳도 없어진다. 조금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성장에 대한 압박과 고민까지 떨치기는 어렵다.


다행히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방법이 있다. 여행. 일상 속 변화는 거추장스럽고 힘이 들지만, 여행지에서의 변화는 신선한 자극이다. 그래서 여행지를 고르는 일은 내가 어떤 유형의 변화를 받아들일지 정하는 일종의 라이프 디자인이다. 단순히 좋은 곳을 고르는 게 아니라, 미래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기대하는 선택의 과정인 것이다. 그 들뜬 기분을 느끼기 위해 여행 카페 Hey there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또래의 대표가 운영하는 곳. 1년 넘게 단골인 스페인 유학생과, 여행계획을 짜는 사람들이 모이는 아지트. 어쩌면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첫 여행지를 찾기로 했다.



Hey there는 합정역 근처지만 막상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골목에 위치해 있다. 갈림길에 서서 ‘정말 이 골목이 맞나’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제대로 찾아온 거다. 지나가다 발견하긴 어렵지만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일상 속에서 여행을 즐기기에 딱이다.

지하 갤러리에서는 여행사진전, 회화전 등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대관문의 info@gongshall.com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마그넷과 여행사진들이 눈에 띈다. 동유럽부터 남미, 아프리카 등 끝도 없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무작정 떠나고 싶어진다. 어디로 떠날까. 돌이켜보면 선택지가 많을수록 나의 기준과 컨디션을 먼저 확인해야 했다. 이걸 생략하면 꼭 전혀 엉뚱한 걸 고르고 뒤늦게 후회했다.



2층에 올라가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30명이 넉넉히 앉을만한 공간에는 대표가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든 테이블과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가 함께 놓여있었다. 한쪽 벽에는 네임택과 캐리어가 마치 미술관인 듯 전시되어 있고 반대편 책장에는 각종 가이드북과 여행에세이가 꽂혀 있다. 여행책 중 눈에 띄는 것 몇 권을 골라 앉으려는데 소파가 눈에 띈다. 여행자들이 바쁜 일정 중에 1-2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걸 파워 냅(power nap)이라고 부르는데, 잠깐이라도 쉬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들여놓은 소파라고 한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아지트답다. 



문득 런던에서 낮잠을 파는 스타트업이 떠올랐다. 임대료가 부담스러워 도심 외곽에서 출퇴근하는 젊은 직장인에게는 낮잠 시간이 그야말로 오아시스다. 빡빡하게 시간을 채우는 대신 쉼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보면 이 작은 여행도 시간을 다르게 쓰기 위해 시작했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이 배우는 법.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이는 경험을 만드는 법. 이런 것들을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시간을 배우기에 최적인 도시가 있다.



두 블럭만 걸어도 빈티지숍과 구제 옷가게를 만날 수 있는 전통의 도시. 하지만 여전히 세련된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세계 4대 디자인 페스티벌 중 하나로 꼽히는 행사를 주최하며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곳. 런던이다. 클래식과 혁신이 공존하는 도시 속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시간이 부족해서 시작한 여행이니, 시간을 사러 떠나야겠다. 스마트폰을 꺼내 서울 속 런던을 찾기 시작했다.

INFORMATION
02-333-6707
서울 마포구 양화로16길 14-16


그리고 3일 뒤, 서울 Soho로 가는 버스를 탔다(이어보기)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