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를 알기 위한 8가지 키워드

<공셸#>는 작가, 도시, 행사 등 다양한 문화 예술과 관련된 이슈를 8개의 키워드로 알아보는 코너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숨겨져있던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공셸#에서 알아보도록 한다.
2018년 5월 27일, 한국 미술 역사상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졌다.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x220cm, 1972)가 홍콩 경매에서 85억 3,000만원에 낙찰되어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작품구매수수료*까지 포함하면 100억이 넘는 금액으로 작품이 판매된 것이다. 한국 미술계에 김환기가 끼친 영향은 100억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진다. 공셸에서는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8가지 키워드로 살펴보고, 그의 작품이 가진 매력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작품구매수수로 : 미술품을 경매를 통해서 구매할 경우 경매회사에 낙찰가의 각 경매사에서 정한 퍼센트만큼 수수료를 지급한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국내 경매에서는 15%를 홍콩 경매에서는 18%를 각각 구매수수료로 받고 있다.(부가가치세 별도))

수화(김환기)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 근원 김용준, 근원수필 중에서
#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섬소년, 동경에서 새로운 눈을 뜨다.
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의 대지주였던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족할거 없이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큰 재능을 보였고, 집안에 화실을 두고 작업에만 매진할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1931년 김환기는 일본 동경으로 넘어가 본격적인 세계의 미술을 접하기 시작한다. 1933년 니혼대학 미술학부에 입학, 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추상화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 고뇌하였다.
그의 초기작 <론도>(1938)는 당시 풍경화, 인물화 위주였던 한국 화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곡선과 직선, 기하학적 형태로 구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어 있다.

김환기 <론도>, 61×72.7cm, 캔버스에 유채
"오늘의 미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김환기
# 파리, 늦은 나이에 감행한 용감한 도전
1937년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 그는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해군종군화가가 되었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천박한 문화예술계의 풍토나 국민들의 문화 경시 풍조로 김환기의 마음을 더 넓은 곳으로 돌리게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세계 미술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956년, 결국 그는 44세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학장 자리를 버리고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김환기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자,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권한 이는 부인 김향안이었다. 부인과 함께 파리에서 그는 예술 행보를 이어간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개인전과 그룹전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확신을 갖게 된다. 1957년 개인전으로 니스에 머물고 있던 김환기는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속 푸른색의 정신과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유럽에서의 체험이 익숙해지면서 본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확신을 엿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의 첫 전시, 파리 M. 베네지트 화랑에서 진행된 김환기 개인전 포스터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이 아니라, 동해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
나도 이번 니스에 와서 지중해를 보고 어제는 배도 타봤습니다만,
우리 동해처럼 그렇게 푸르고 맑지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르도록 흰빛을 사랑하고 흰옷을 많이 입습디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간결을 사랑하고, 흰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개인전 할 당시 니스 방송국에서 한 이야기. 김환기, 편편상. 1961.9-
# 뉴욕, 그의 마지막 예술혼이 불태워진 도시
파리 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작품에 몰두한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고, 회화부분에서 명예상을 수상한다. 이후 그의 발걸음은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그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뉴욕이란 도시에서 한두 달 정도 머물면서 경험을 쌓을 심산이었다. 당시 뉴욕은 버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세계 화단을 휩쓸던 때였다. 짧게 머물 예정이었지만 그는 끝내 뉴욕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도시가 되었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뿐이었으니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이 가득차다."
- 김환기, 1967년 10월 13일
김환기는 뉴욕에서 순수 추상의 작품에 몰두한다. 1960년대 말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점화’작업에 착수한다. 이 시기의 작업은 주로 청아한 푸른색을 주로 사용한다. 이 색을 이른바 ‘환기블루’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1970년,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도중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김환기의 뉴욕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김환기의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타국에서 생활하며 그리운 가족을 생각하며 하루에 16시간 동안 점을 찍어가며 완성한 이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계는 그의 새로운 화풍에 열광하며 건재함에 안도 하였다. 그렇게 그는 뉴욕에서 동양적 예술철학과 서양적 추상미술이 융합된 “서정 추상”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완성하였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 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 김환기
그는 1974년 7월 25일 향년 61세에 뇌출혈로 인하여 고향을 그리워 하며 머나먼 타국인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다.
# 김환기의 영원한 뮤즈, 김향안 (1916~2004)
김향안 여사는 본명이 변동림으로 미모와 문학적 재능을 겸비한 당대의 '여신'이었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그녀는 1936년 스무 살에 그녀의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의 절친 이었던 천재시인 이상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녀의 남편인 이상이 일본에서 2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져있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김환기를 만난다. 당시 김환기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 이른바 ‘돌싱’이었다. 1944년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은 재혼한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아이가 셋이나 딸리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김환기랑 ‘재혼’을 하겠다는 딸을 집안에서 허락을 했을 리가 만무했다. 집안에 반대에도 두 사람은 혼인을 하면서 그녀는 가문과의 인연을 끊는다. 그러면서 본명인 변동림이라는 이름 대신에 남편의 성과 호 이었던 시골 향, 언덕 안 ‘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이 때 김환기도 자신의 호를 부인에게 내어주고 ’수화‘로 바꾼다.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이 후 김향안 여사는 평생을 남편 김환기의 생계와 작품 활동을 내조했다. 김환기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도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6.25 피난 중에도 불어를 공부했으며 파리로 1년 먼저 건너가 남편이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뉴욕에서 지낼 때도 니스, 브리첼 등의 도시에서 남편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남편의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이렇게 헌신적인 아내 김향안을 김환기는 평생에 걸쳐 사랑했으며, 그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김환기는 김향안과 잠시 헤어져 있던 시기마다 편지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전하였다.

1955년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며 진눈깨비를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하는 동림이.
김환기, 1955년

향안, 빨리 와야겠다.
이런 것 가지고는 실감이 안나니 이야기가 안 돼.
오른쪽은 시작해 본 거와 왼쪽은 전에 것 그대로 인데 엷게 그려본 거야.
나는 오른쪽 그림에 매력을 느껴요.
바닥은 순백색이고 주로 빨강, 파랑, 녹색, 향안도 눈이 영롱해지지 못했을 거야.
서울의 바쁜 생활 속에서는 당신의 발달한 시각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겠지.
빨리 와서 그림을 봐주어요. 내 그림에 감동이 되었다가도, 가다가는 회의가 생기고 그래요.
왜, 편지가 안 들어오나. 오늘도 편지가 없을까.
김환기, 1963년
# 윤형근 (1928~2007)의 스승이자 가족이었던, 김환기
한국의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에게 김환기는 스승이자 가족이었다. 1947년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의 주임교수가 김환기이었다. 1949년 그는 국가 반체제운동으로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고 이 일로 서울미대를 휴학한다. 이후 복학을 희망했지만 거부당했고 당시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배려로 홍대 미대로 편입한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60년 김환기는 윤형근에게 청첩장을 받는데, 결혼 당사자가 다름 아닌 김영숙과 윤형근 자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장인이 된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를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김환기도 윤형근을 ‘아들’처럼 여겼다. 그는 1970년대에 화면을 수직 또는 수평으로 분할하고 공간을 설정해 생겨나는 청색 또는 흑갈색의 면을 통해 서체적인 선의 구성이나 수묵의 얼룩과 번짐, 수축 등의 오묘한 변화를 연상시키는 회화를 선보였다. 이렇게 윤형근이 번짐을 소재로 작품을 하게 된 것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김환기가 타계 보름 전인 1974년 7월 10일 사위 윤형근과 딸 영숙씨 내외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 김환기를 만날 수 있는 곳, 환기미술관
1974년 김환기가 숨을 거두고, 그의 부인인 김향안은 남편을 위한 행보를 이어간다. 1976년에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끌기 위한 환기재단을 설립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여 김환기의 작품을 소개하고 알렸다.
부암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환기미술관의 설립은 김향안의 생전 숙원 사업이자 사명이었다. 김환기는 서울 서교동에 있는 집의 빈터에 4층짜리 집을 짓고 두 층은 가족이 쓰고 두층은 사설 미술관을 하고 싶어 했다. 그가 일기장에 소망을 적은지 27년 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이 아내 김향안에 의하여 탄생하였다. 김환기에 대한 애정,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환기미술관은 본관, 별관, 수향산방 이렇게 세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과 별관에서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를 감상할 수 있으며, 수향산방은 김환기와 김향안의 호인 ‘수화’와 ‘향안’에서 이름을 딴, 부부가 결혼 후 신혼을 보냈던 성북동 수향산방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공간이다. 건물의 디자인은 김환기가 생전 구상했던 아틀리에의 형태를 반영했다고 하며 종종 이곳에서 특별 전시가 열리기도 한다.

현재 환기미술관에는 <김환기 카탈로그 레조네 출판기념전>이 진행되고 있다
# TOP
2013년 빅뱅의 TOP이 발매한 솔로곡 <둠다다> 뮤직비디오에서 김환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환기의 <사슴>이 등장한 것. 김환기는 TOP의 외조부인 서근배 작가의 외삼촌으로 먼 친척관계이다. <둠다다>의 ‘범상치 않은 코리안’이라는 가사에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작품을 공개했다고 한다.
2016년 세계적인 경매회사 소더비와 함께 TOP은 ‘#TTTOP’라는 이브닝 세일 이벤트를 기획하였는데, 이때도 김환기의 <비상>을 선보였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TOP은 “어릴 적 '다른 거장들의 회화 안에서는 음악이 있는 것 같소.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나는 그 노래를 계속 찾아갈 것이오.'라는 김환기의 일기를 보고 감동했어요. 저는 음악을 하고 캐릭터를 분석해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 시각적인 것에서 힌트를 얻을 때가 많아요. 젊은이들이 저처럼 미술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라며 김환기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하였다.

TOP의 둠다다 뮤직비디오에 나온 김환기의 <사슴>
# ‘김환기의 라이벌은 김환기’ 국내 근현대 미술 경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김환기
최근 2,3년 사이에 한국의 단색화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김환기의 뉴욕시대의 작품들이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며 국내 미술 경매시장을 들끓게 하고 있다. 국내 미술품 경매가 상위 10위 안에 7위를 차지한 이중섭 <소>와 9위를 차지한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환기가 차지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환기의 작품 판매 기록은 모두 2015년에서 2018년까지 3년 안에 벌어진 일이다. 마치 ‘김환기 열풍’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미술품 경매가 순위 TOP 10
먼저, 김환기가 뉴욕에서 생에 마지막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탐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공고히 하였다. 둘째로, 파리, 상파울루, 뉴욕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던 작가였기에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마지막으로 환기재단과 환기미술관을 중심으로 그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 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는 점 등이 컬렉터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근현대 경매가 1위 작품, 김환기 <3-Ⅱ-72 #220> (붉은 점화)
에디터 김은지
김환기를 알기 위한 8가지 키워드
2018년 5월 27일, 한국 미술 역사상 기념비적인 일이 벌어졌다.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x220cm, 1972)가 홍콩 경매에서 85억 3,000만원에 낙찰되어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작품구매수수료*까지 포함하면 100억이 넘는 금액으로 작품이 판매된 것이다. 한국 미술계에 김환기가 끼친 영향은 100억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진다. 공셸에서는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8가지 키워드로 살펴보고, 그의 작품이 가진 매력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작품구매수수로 : 미술품을 경매를 통해서 구매할 경우 경매회사에 낙찰가의 각 경매사에서 정한 퍼센트만큼 수수료를 지급한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국내 경매에서는 15%를 홍콩 경매에서는 18%를 각각 구매수수료로 받고 있다.(부가가치세 별도))
수화(김환기)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 근원 김용준, 근원수필 중에서
#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섬소년, 동경에서 새로운 눈을 뜨다.
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의 대지주였던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족할거 없이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큰 재능을 보였고, 집안에 화실을 두고 작업에만 매진할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1931년 김환기는 일본 동경으로 넘어가 본격적인 세계의 미술을 접하기 시작한다. 1933년 니혼대학 미술학부에 입학, 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추상화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 고뇌하였다.
그의 초기작 <론도>(1938)는 당시 풍경화, 인물화 위주였던 한국 화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곡선과 직선, 기하학적 형태로 구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어 있다.
김환기 <론도>, 61×72.7cm, 캔버스에 유채
"오늘의 미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김환기
# 파리, 늦은 나이에 감행한 용감한 도전
1937년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 그는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해군종군화가가 되었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천박한 문화예술계의 풍토나 국민들의 문화 경시 풍조로 김환기의 마음을 더 넓은 곳으로 돌리게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세계 미술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956년, 결국 그는 44세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학장 자리를 버리고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김환기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자,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권한 이는 부인 김향안이었다. 부인과 함께 파리에서 그는 예술 행보를 이어간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개인전과 그룹전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확신을 갖게 된다. 1957년 개인전으로 니스에 머물고 있던 김환기는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속 푸른색의 정신과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유럽에서의 체험이 익숙해지면서 본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확신을 엿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의 첫 전시, 파리 M. 베네지트 화랑에서 진행된 김환기 개인전 포스터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이 아니라, 동해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
나도 이번 니스에 와서 지중해를 보고 어제는 배도 타봤습니다만,
우리 동해처럼 그렇게 푸르고 맑지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르도록 흰빛을 사랑하고 흰옷을 많이 입습디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간결을 사랑하고, 흰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개인전 할 당시 니스 방송국에서 한 이야기. 김환기, 편편상. 1961.9-
# 뉴욕, 그의 마지막 예술혼이 불태워진 도시
파리 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작품에 몰두한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고, 회화부분에서 명예상을 수상한다. 이후 그의 발걸음은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그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뉴욕이란 도시에서 한두 달 정도 머물면서 경험을 쌓을 심산이었다. 당시 뉴욕은 버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세계 화단을 휩쓸던 때였다. 짧게 머물 예정이었지만 그는 끝내 뉴욕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도시가 되었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뿐이었으니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이 가득차다."
- 김환기, 1967년 10월 13일
김환기는 뉴욕에서 순수 추상의 작품에 몰두한다. 1960년대 말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점화’작업에 착수한다. 이 시기의 작업은 주로 청아한 푸른색을 주로 사용한다. 이 색을 이른바 ‘환기블루’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1970년,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도중 한국일보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김환기의 뉴욕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김환기의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타국에서 생활하며 그리운 가족을 생각하며 하루에 16시간 동안 점을 찍어가며 완성한 이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계는 그의 새로운 화풍에 열광하며 건재함에 안도 하였다. 그렇게 그는 뉴욕에서 동양적 예술철학과 서양적 추상미술이 융합된 “서정 추상”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완성하였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 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 김환기
그는 1974년 7월 25일 향년 61세에 뇌출혈로 인하여 고향을 그리워 하며 머나먼 타국인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다.
# 김환기의 영원한 뮤즈, 김향안 (1916~2004)
김향안 여사는 본명이 변동림으로 미모와 문학적 재능을 겸비한 당대의 '여신'이었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그녀는 1936년 스무 살에 그녀의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의 절친 이었던 천재시인 이상과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녀의 남편인 이상이 일본에서 2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져있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김환기를 만난다. 당시 김환기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이가 셋이나 있는 이른바 ‘돌싱’이었다. 1944년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은 재혼한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아이가 셋이나 딸리고 가진 것 하나 없는 김환기랑 ‘재혼’을 하겠다는 딸을 집안에서 허락을 했을 리가 만무했다. 집안에 반대에도 두 사람은 혼인을 하면서 그녀는 가문과의 인연을 끊는다. 그러면서 본명인 변동림이라는 이름 대신에 남편의 성과 호 이었던 시골 향, 언덕 안 ‘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이 때 김환기도 자신의 호를 부인에게 내어주고 ’수화‘로 바꾼다.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이 후 김향안 여사는 평생을 남편 김환기의 생계와 작품 활동을 내조했다. 김환기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도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6.25 피난 중에도 불어를 공부했으며 파리로 1년 먼저 건너가 남편이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뉴욕에서 지낼 때도 니스, 브리첼 등의 도시에서 남편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남편의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이렇게 헌신적인 아내 김향안을 김환기는 평생에 걸쳐 사랑했으며, 그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김환기는 김향안과 잠시 헤어져 있던 시기마다 편지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 마음과 사랑을 전하였다.
1955년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며 진눈깨비를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하는 동림이.
김환기, 1955년
향안, 빨리 와야겠다.
이런 것 가지고는 실감이 안나니 이야기가 안 돼.
오른쪽은 시작해 본 거와 왼쪽은 전에 것 그대로 인데 엷게 그려본 거야.
나는 오른쪽 그림에 매력을 느껴요.
바닥은 순백색이고 주로 빨강, 파랑, 녹색, 향안도 눈이 영롱해지지 못했을 거야.
서울의 바쁜 생활 속에서는 당신의 발달한 시각도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겠지.
빨리 와서 그림을 봐주어요. 내 그림에 감동이 되었다가도, 가다가는 회의가 생기고 그래요.
왜, 편지가 안 들어오나. 오늘도 편지가 없을까.
김환기, 1963년
# 윤형근 (1928~2007)의 스승이자 가족이었던, 김환기
한국의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에게 김환기는 스승이자 가족이었다. 1947년 윤형근은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의 주임교수가 김환기이었다. 1949년 그는 국가 반체제운동으로 중부경찰서에 42일간 구류되고 이 일로 서울미대를 휴학한다. 이후 복학을 희망했지만 거부당했고 당시 홍익대 미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배려로 홍대 미대로 편입한다. 그는 홍대 미대 재학 중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을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60년 김환기는 윤형근에게 청첩장을 받는데, 결혼 당사자가 다름 아닌 김영숙과 윤형근 자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장인이 된다.
윤형근은 장인 김환기를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김환기도 윤형근을 ‘아들’처럼 여겼다. 그는 1970년대에 화면을 수직 또는 수평으로 분할하고 공간을 설정해 생겨나는 청색 또는 흑갈색의 면을 통해 서체적인 선의 구성이나 수묵의 얼룩과 번짐, 수축 등의 오묘한 변화를 연상시키는 회화를 선보였다. 이렇게 윤형근이 번짐을 소재로 작품을 하게 된 것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김환기가 타계 보름 전인 1974년 7월 10일 사위 윤형근과 딸 영숙씨 내외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 김환기를 만날 수 있는 곳, 환기미술관
1974년 김환기가 숨을 거두고, 그의 부인인 김향안은 남편을 위한 행보를 이어간다. 1976년에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끌기 위한 환기재단을 설립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개관하여 김환기의 작품을 소개하고 알렸다.
부암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환기미술관의 설립은 김향안의 생전 숙원 사업이자 사명이었다. 김환기는 서울 서교동에 있는 집의 빈터에 4층짜리 집을 짓고 두 층은 가족이 쓰고 두층은 사설 미술관을 하고 싶어 했다. 그가 일기장에 소망을 적은지 27년 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이 아내 김향안에 의하여 탄생하였다. 김환기에 대한 애정,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환기미술관은 본관, 별관, 수향산방 이렇게 세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과 별관에서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를 감상할 수 있으며, 수향산방은 김환기와 김향안의 호인 ‘수화’와 ‘향안’에서 이름을 딴, 부부가 결혼 후 신혼을 보냈던 성북동 수향산방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공간이다. 건물의 디자인은 김환기가 생전 구상했던 아틀리에의 형태를 반영했다고 하며 종종 이곳에서 특별 전시가 열리기도 한다.
현재 환기미술관에는 <김환기 카탈로그 레조네 출판기념전>이 진행되고 있다
# TOP
2013년 빅뱅의 TOP이 발매한 솔로곡 <둠다다> 뮤직비디오에서 김환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환기의 <사슴>이 등장한 것. 김환기는 TOP의 외조부인 서근배 작가의 외삼촌으로 먼 친척관계이다. <둠다다>의 ‘범상치 않은 코리안’이라는 가사에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작품을 공개했다고 한다.
2016년 세계적인 경매회사 소더비와 함께 TOP은 ‘#TTTOP’라는 이브닝 세일 이벤트를 기획하였는데, 이때도 김환기의 <비상>을 선보였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TOP은 “어릴 적 '다른 거장들의 회화 안에서는 음악이 있는 것 같소.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나는 그 노래를 계속 찾아갈 것이오.'라는 김환기의 일기를 보고 감동했어요. 저는 음악을 하고 캐릭터를 분석해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 시각적인 것에서 힌트를 얻을 때가 많아요. 젊은이들이 저처럼 미술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라며 김환기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하였다.
TOP의 둠다다 뮤직비디오에 나온 김환기의 <사슴>
# ‘김환기의 라이벌은 김환기’ 국내 근현대 미술 경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김환기
최근 2,3년 사이에 한국의 단색화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김환기의 뉴욕시대의 작품들이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며 국내 미술 경매시장을 들끓게 하고 있다. 국내 미술품 경매가 상위 10위 안에 7위를 차지한 이중섭 <소>와 9위를 차지한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환기가 차지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환기의 작품 판매 기록은 모두 2015년에서 2018년까지 3년 안에 벌어진 일이다. 마치 ‘김환기 열풍’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미술품 경매가 순위 TOP 10
먼저, 김환기가 뉴욕에서 생에 마지막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탐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공고히 하였다. 둘째로, 파리, 상파울루, 뉴욕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던 작가였기에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마지막으로 환기재단과 환기미술관을 중심으로 그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 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는 점 등이 컬렉터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근현대 경매가 1위 작품, 김환기 <3-Ⅱ-72 #220> (붉은 점화)
에디터 김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