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창백한 푸른 점

에디터 고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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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지 작가



누구나 '인연은 필연적인 것'임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운명의 한 쌍을 잇는다는 동양 민담의 붉은 실, 누구나 여섯 다리만 거치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케빈 베이컨 놀이처럼. 함부로 끊지도, 뜻대로 풀지도 못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오랜 시간 과학과 예술이 동시에 관심을 가져온 화두였고, 마침내 조현지 작가의 그림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왜 나와 너가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를 갈망하게 됐을까.


사람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캔버스 위의 숱한 점과 선은 영국 시인 존 던의 명문처럼 단호하게 말을 건넨다. 뭉근하고 모호한 색이 스민 면 너머로 한밤의 불빛처럼 희미한 점들이 고개를 들면, 뒤이어 수많은 점들을 하나의 군체로 연결하는 가냘프고 섬미그  실선이 드러난다. 그 광경이 흡사 강풍에 휘날리는 거미줄처럼 처연해도, 여전히 점과 점의 무리는 그물처럼 질긴 선을 내어 서로를 얽고 지탱한다. 외롭지만 분명 외롭지 않은 존재들. 그 모습이 은근하게 마음을 데운다.
“늘 의식하고 살지는 않지만,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평생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내 감정을 토로하거나 공유하는 게 힘드니까요. 제 작업은 온전히 그 관계에 주목해요. 애초에 포착하기 힘든 것들을 표현하려는 시도로.”

 31x41cm, Gouache and watercolor on cotton paper, 2018


조 작가는 늘 동일한 순서로 작업한다. 면을 그린 다음 이어서 선을 그린다. 점은 맨 마지막이다. 이 모든 요소에 고집과 정성이 깃들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작가가 공들이는 것은 바로 ‘관계’, 즉 선의 묘사다. 젯소를 바른 캔버스 위에 선의 색을 먼저 칠하고, 색이 마르면 바탕이 될 면의 색을 덧칠한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나면, 판화처럼 바늘 따위로 표면을 긁어내 음각의 선을 낸다. 덧칠이 벗겨지며 그 속에 숨었던 선의 색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머리로는 이미 잘 알고 있지만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던 관계의 흔적. 나와 너 혹은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겉치레인 동시에 속얘기일 수 있는 '관계의 아이러니'와 비로소 마주하는 순간이다.

 41x51cm, Gouache and watercolor on cotton paper, 2018

 
작가의 일관된 주제와 작업 방식의 반복은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깨달음으로 보상했는지 모른다. 무수한 점을 잇는 엷은 선의 흔적은 단지 막막한 어둠, 광활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개인의 외로움만을 위로하지는 않는다. 면과 면이 만나는 접촉의 순간, 점과 점이 하나의 선을 타고 교류하는 풍경에는 막연한 공허와 불안, 결핍을 일거에 침묵시키는 원시적인 긍정이 있다.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당길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빛나는 불빛들처럼. 점 하나하나에 소중한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알이 새기면서, 작가는 이대로 늘 예민하게 마음의 감각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적어도 이대로 덤덤해지긴 싫어요. 소중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 느끼는 그때의 감정, 그때의 마음들을 잊지 않고 잡아두고 싶어요. 그들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느끼고 끄집어낼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어요. ‘진짜 마음’에 담긴 것들을."
 

<밤은 다정하다_0-3> 72.7x116.8cm, oil on canvas, 2014


<달이 따라오다_Looking after you 1> 72.7x116.8cm, oil on canvas, 2014


여전히 여백의 무수한 섬, 아니 점들에는 선의 다리가 놓일 것이다. 어떤 이에겐 그저 작은 점과 점을 잇는 지루한 일이겠지만, 홀로 번민하는 누군가에겐 너와 나, 사람과 사람, 우주와 우주를 잇는 업적일 수 있다. 마치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처럼, 창백한 푸른 점 하나하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고 맞잡는 손길이자 소통을 향한 열렬한 부호가 된다. 그제야 그림을 보는 이는 불현듯 깨달을지 모른다. 이토록 파리하고 연약한 실줄이 끈질기게 너와 나를 잇고 있었다는 걸, 이 사사롭고 보잘 것 없는 ‘연결’이 그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20x25cm, Gouache on cotton paper, 2018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조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