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거리 낙서가 예술로 불리는 이유는?

GONG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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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와 '낙서 예술'의 시대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장!

한 작품이 무려 1억 1,050만 달러, 우리 돈 약 1,250억 원에 낙찰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작가 작품 중 역대 최고가 기록한 것! 주인공은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낙서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무제(1982)’였다.

거리에서 낙서를 그리던 바스키아는 어떻게 현대미술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낙서는 어떻게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을까?

 



80년대 뉴욕을 달군 전설적인 전시, <타임스퀘어 쇼>

1980년 6월, 뉴욕! 한 달 동안, 24시간 쉬지 않고 열리는 대대적인 전시 프로젝트 <타임스퀘어 쇼>가 열렸다. <타임스퀘어 쇼>는 진취적인 예술가 집단 ‘코랩(Colab)’이 기획한 전시였다. 회화, 조각, 공연, 음악, 패션 등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실험하는 무대였다. 거리의 벽이나 지하철에 그림을 그리던 소위 그래피티, 낙서 화가라 불리는 이들도 참여해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모색한 전시, <뉴욕, 뉴웨이브>

이듬해인 1981년, 현대미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현대미술관 PS1에서는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는 <뉴욕, 뉴웨이브> 전시가 열렸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앤디 워홀을 비롯한 100여 명의 아티스트, 바스키아도 참여해 그 존재를 알린다. 하위문화로 치부되었던 거리 예술이 높게만 느껴졌던 상류 사회 갤러리 속으로 파고들게 된 것이다.



뉴욕 아티스트들의 핫 플레이스, '머드 클럽'

<뉴욕, 뉴웨이브>는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가 기획한 전시였다. 코르테즈는 1978년 대안문화공간이자 예술가들의 핫플레이스인 ‘머드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의 클럽은 갤러리나 미술관 중심의 기존 예술 문화를 거부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기도 했다. 주류 문화에 저항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 공연과 안나 수이 같은 신흥 패션디자이너의 런웨이, 키스 해링의 실험적인 전시가 열리는 등 새로운 물결을 넘어 ‘No Wave’ 문화를 만들어 갔다. 바스키아도 이곳에서 디에고 코르테즈와 인연을 맺게 된다.


머드 클럽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앤디 워홀, 데이빗 보위 같은 유명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 앤디 워홀의 역사적인 만남도 이뤄진다. 저항문화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디에고 코르테즈에게 거리의 예술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



자유와 저항의 물결이 밀려오던 '20세기 뉴욕', '이스트 빌리지'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주류 문화에 대립하는 저항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지속되는 한편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반전 운동과 함께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커져갔다. 인종차별 철폐, 여성 인권 신장, 동성애자 해방 운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히피 문화 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사회 문화적으로도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예술가들은 모더니즘이 만든 예술 장르 간 폐쇄성, 문화에 대한 계급 나누기에 반발했다. 난해한 추상성 때문에 생긴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다. 개인을 중시하고 대중성을 되찾고자 한 포스트모더니즘 운동! 이 운동의 모토였던 ‘예술을 삶 속에 통합 시키자’는 외침을 이루기 위해, 당시의 아티스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뉴욕 맨해튼의 남동쪽에 위치한 이스트 빌리지에서 특히 활발하게 일어났다. 1960-1970년대 미국의 예술 중심지는 소호였다. 하지만,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젊은 예술가들은 집값이 싼 이스트 빌리지로 밀려나야 했다. 가난한 이민자들의 도시였던 이스트 빌리지에는 다양한 소수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예술인 공동체를 만들었고 자유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마주한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슈퍼스타 바스키아'와 '낙서 예술'의 탄생

바스키아도 이스트 빌리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뜻의 낙서 그룹 세이모(SAMO)를 결성하고, 인종차별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낙서들을 이어갔다. 자신들만의 새로운 미술 형태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이름 뒤에 저작권을 뜻하는 기호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바스키아는 예술가들이 모인 ‘Club 57’과 ‘Mudd Club’ 등에서 활동하며 낙서는 물론 음악과 패션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때 디에고 코르테즈를 만난 바스키아! 이제 거리가 아닌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기호, 알 수 없는 문자 배열이 함께 담긴 작품은 구상과 추상이 뒤섞인 새로운 형태로 미술 관계자들을 매료시켰다. 밀려오는 거대 자본을 소화할 수 있는 ‘스타’가 필요했던 갤러리 사람들은 앞다투어 바스키아의 전시를 열어주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판매되기도 했다. 그렇게 거리의 낙서는 인종과 계급,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거듭났다.





ART C: curation contents

장 미셸 바스키아의 미술세계를 비롯해, 여러 낙서 화가가 떠오른 7080 미국 뉴욕 예술계에 더 빠져보고 싶다면  ART C가 추천하는 아래 콘텐츠를 만나보자!

첫 번째, 영화 <바스키아>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이다. 세이모란 이름으로 거리 낙서를 시작한 시절부터 화단이 주목하는 천재 화가로 살다 27살에 약물 중독으로 죽은 바스키아. 짧고 화려했던 바스키아의 삶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성공 뒤에 가려진 바스키아의 고뇌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볼 수 있다.

이어서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장 미셸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도 추천! 바스키아의 작품을 원화로 150여 점이나 볼 수 있다. 공셸이 다녀온 전시 소개 영상도 먼저 보시면 도움이 될테니 놓치지 말고 보고 가자.

 

다음은 Gray의 앨범 <Shades Of...> 다.

바스키아가 1979년에 빈센트 갈로 등과 결성한 밴드 Gray의 앨범이다. 머드 클럽을 비롯한 여러 클럽들에서 공연도 했다고 전해진다. 바스키아가 만든 음악을 들으면서 전시를 보셔도 색다른 경험이 되지 않을까?


마지막 추천은 영화 <조커>다. 영화의 배경은 유색인종이 많이 살고 경제적으로도 침체돼 있던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다. 당시 비주류 문화의 발판이 되어준 공간 ‘패션 모다’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낙서 화가들의 주 무대였던 브롱크스에 사는 조커를 보고 있으면, 이 시대가 소외계층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낙서 화가와 조커가 등장한 시대와 장소가 궁금하다면 꼭 봐야할 영화다.



클릭 / 클럽 인싸에서 슈퍼스타가 된 사람, 장 미셸 바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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