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쓸쓸한 것들을 위한 초청장

에디터 진성훈
2019-09-26

한아름 작가


한없이 순수하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 태어나면서부터 불안과 슬픔에 노출된 이들. 떨어지는 빗물을 피하지 못했던 가련한 목소리들을, 한아름 작가는 한 화면에 그린다. 기꺼이 그것 하나하나에 세상에 둘도 없는 이름을 붙여주고 따뜻한 식사와 지붕을 마련해주려는 듯. 우리가 그림 앞에서 품는 정체모를 안도감과 뭉클함은, 분명 그 성정에서 퍼진 온기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그것은, 언제나 당위였는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 가여워서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어리고 취약하며 힘없는 존재들을 연민할 줄 아는 심성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대상은 하나같이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덩그러니 남겨진 낡은 장난감, 버림받은 반려동물과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 한 작가는 화사하고 명랑한 색감, 안정된 구도를 통해 상냥하고 사려깊게 대상을 묘사한다. 그 배경에는 더 이상 불안이나 상처를 잠재한 그 어떤 징후도 없다. 피사체 하나만을 위해 조성된 것만 같은 그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낙원에서, 그림 속 주인공들은 따뜻한 환대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를 선물받았다. 캔버스의 여백은 이들을 온전히 끌어안도록 비워지고 컬러는 그들이 평소 받지 못한 관심, 입지 못했던 옷이 된다.
“평소 버려지거나 소외당한 이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인간에 의해 유기되거나 고통받는 존재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죠. 제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대부분 보호 받아야 마땅한 불완전한 것들이에요. 그들이 비로소 완전한 쉼과 합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세계, 그런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다룹니다.”

[소녀의 길] 130.3x162.2cm, 캔버스에 유채, 2013

한아름 작가


온기로 충만한 이 판타지 세계는 사실 차가운 우리 주변의 현실에서 왔다. 대학 시절 봉사활동을 통해 만난 보육원 아이들과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한 작가는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을 화폭에 담기로 마음먹었다. 단지 소외된 어린이들뿐만 아니다. “모피코트를 위해 잔인하게 희생되는 하프물범과 토끼, 산채로 상어잡이 미끼로 사용되는 개와 고양이, 밀수된 앵무새, 염색 병아리, 멸종위기 동물” 등 다양하고 측은한 존재들이 먹이와 쉼을 찾아 그의 유토피아에 모여든다.

[백공작이 있는 풍경 6] 72.7x100.0cm, 캔버스에 유채, 2019


그림은 첫눈에 아름답고 두 번째에 침묵시키며, 세 번째 응시에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기운을 지녔다. 피사체의 아픔을 공유하고 다독이며 보는 이의 번잡한 마음마저 잠잠하게 만든다. 청아하고 정제된 그림이다. 유화, 수채화, 구아슈, 색연필,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한 작가지만 가장 즐겨 사용하는 건 유화 물감.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착과 연민은 길고 신중한 몰입을 거쳐 오롯한 형태와 색을 띈다.
“개인적으로 ‘시간성’이 느껴지는 그림을 좋아해요. 스케치를 꽤 꼼꼼하게 하는 편인데, 그 위에 유화를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쌓아 올려가죠. 얇게 여러 번 채색하며 밀도를 높이고, 거기에 사실적인 묘사를 더하면 일반적인 유화 글레이징 기법과는 조금 다른, 플랫하면서 맑고 깊은 맛이 나오더라고요.”

[home 3] 50.0x72.7cm, 캔버스에 유채, 2014


휴머니즘으로 충만한 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현실의 액티비즘까지 외연을 넓혔다. 환경과 동물에 관한 서적과 기사, 다큐멘터리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붓질은 어쩌면 현실의 우리로 말미암아 경종과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최선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아하고 예쁜 색과 그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전혀 그에 견줄 만큼 아름답지도, 동화 같지도 않은 불편하고 어색하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소음 속에서도 가장 또렷하고 단호하게 들리는 것은, 부디 자신의 가련한 소재들로부터 멀리 눈돌리지 말아달라는 작가의 절실한 당부다.
“여전히 상처와 고통으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제 작업이 따뜻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길 바라죠. 현실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치유의 '판타지 랜드'가 되길 기대해요.”

[앵무새가 있는 방 2] 45.5x53.0cm, 캔버스에 유채, 2017


“다음 작업이 기대되는 작가”를 꿈꾸는 한 작가에겐 그리고 싶은, 그려야만 하는 소재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애잔한 마음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쓸쓸한 존재들을 데리고 당도해야만 하는 목적지가 남아있다. 이 현실과 저 상상의 세계 어딘가에는 그가 그림을 통해 꿈꿔왔던 군락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힘주어 제 이름을 말할 수 없을, 응어리지고 위축된 모든 마음들이 당당하고 순전하게 무리를 이룬. 그곳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날까지 한아름 작가는 늘 캔버스 한구석에 가련한 이들을 위한 거처를 남겨둘 것이다. 아무도 상처받거나 상처주지 않을,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약속의 땅을 기다리며.

[목마 3] 90.9x72.7cm, 혼합 매체, 2012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한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