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FOCUS> 서동욱의 찰나들

에디터 고석희
2019-08-22

빈 감정의 포말이 품은 격랑


매체(Medium)는 종종 화가를 번민하게 한다. 아끼는 누군가의 얼굴이 전에 없던 색으로 그늘질 때,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경이로운 노을빛을 마주할 때 그 순간을 사로잡기 위해선 대상과 상황에 맞는 도구와 조색, 터치가 필요하다. 회화와 영상을 병행해온 서동욱 작가는 각각 매체의 고유한 표현과 그로 인한 체험을 동시에 아우르고 보완하는 실험을 해온 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쉬이 도달하지 못할 정점을 향한 갈증, 표면 아래의 속성을 들여다보려는 야심이 그를 집요하게 여기까지 끌고 온 듯하다. 표정 없는 얼굴에 떠올랐다 금세 휘발되고 마는, 찰나의 감정을 포획할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아침-남색커튼이 있는 침실, Morning-The Bedroom with Navy Curtain] 116.8x80.3cm, 캔버스에 유채, 2016

그림 그리기에 앞서 원본 사진을 촬영할 때 모델에게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는 장면을 표현해보자. 어쩌면 조금 후회할 수도 있겠지.” (서동욱 작가)



구체적 인간의 개별적 감정


방금 전 잠에서 깨 멍하니 침대 머리에 앉은 남자. 그는 마치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이 기분은 어디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어떤 감정의 정체를. 지난 밤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그의 다음 일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림은 인색할 정도로 말을 아낀다.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듯, 어쩐지 이 다음에 연속되는 컷이 따라붙어야 할 것 같은 풍경의 여운만 이어진다.

서 작가는 인물화를 그린다. 그것은 “추상보다는 구상이, 정물이나 풍경이 아닌 인물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그의 그림 속 남자들은 홀로 동굴의 시간을 누린다. 방 한 구석에서 등을 돌려 잠을 청하거나, 리모컨을 쥐고 누워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며. 캔버스 안에서 이야기를 읽어낼 유일한 실마리는 인물들의 표정뿐이지만, 이들의 감은 눈, 표정 없이 굳은 얼굴에서 새로 추출할 수 있는 언어는 거의 없다.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을까. 혹은 더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으려는 걸까.
“제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건 휴머니티(Humanity)입니다. 인간이 가진 구체적 감정, 실존 가치, 기쁨과 슬픔, 고독, 영면의 죽음에 대한 작업이죠.”

서동욱 작가


우리는 색상환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고, 그 색들은 다시 서로 가색과 감색을 반복하며 더 자잘한 감정의 부산물을 남길 것이다. 하지만 서 작가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 어떤 완결된 표정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림 앞에서 이토록 오묘한 쓸쓸함과 회한에 사로잡히는 걸까. 표정은 사람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지만, 그 표정이 부재하는 현상 또한 어떤 고유한 감정을 머금은 매개다. 서 작가가 애정하는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 카티 오우티넨의 얼음장 같은 얼굴 속에도 굽이치는 감정의 실핏줄이 존재하듯, 감정의 단서는 그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분위기'(Atmosphere)에서 발현된다. 그 혹은 그녀가 잠시 머물다 나간 자리가, 미묘한 눈빛과 조용한 한숨이, 낮은 하품과 기침 소리, 무의중의 제스처가 그 공기 중에 떠돈다. 그 어떤 감각이나 소통 수단도 그만큼 치명적이고 신속하게 타인을 침식할 수 없다. 서 작가는 이 불온하고 희미한 공기를 화폭의 인물에게서 부여한다. 남자의 무표정이 품은 뜻모를 의미는, 이미 작가가 수천 수만 번씩 자신의 속에 품었다 비워냈던 기지(旣知)의 감정인지 모른다.


찰나의 푼크툼


서 작가의 초기작은 카메라 플래시에 노출된 지인들의 전신을 담았다. 플래시 섬광이 명멸하던 순간의 그들은 겁없고 의기양양하며 경우에 따라 도발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하지만 한참을 마주한 그 눈빛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반사된 야생동물의 안광처럼 금방 부서질듯 유약해보인다. 그림은 이 양가적인 청춘의 초상을 한 화면에 투사한 채 얼얼하게 물든다. 이는 젊음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바치는 열렬한 경배이자, 영영 붙잡을 수 없을 절정을 안타까워 하는 비탄과 애도다.
“초기작을 작업할 땐 주로 인공 조명을 사용했습니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순간의 인물을 기록함으로써 빛을 기록하는 사진 매체의 특수한 방식을 그림에도 적용하고 싶었습니다. 플래시 섬광이 터지면서 인물을 사진에 각인하는 찰나의 순간이 당시의 테마였던 '청춘 시절'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Teuyo] 130x97cm, 캔버스에 유채, 2008


[BH] 145.5x97cm, 캔버스에 유채, 2013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하는 연출은 서 작가의 작업에 있어 영화가 끼친 의미가 상당하다는 걸 암시한다. 작품 가운데 시나리오의 씬 타이틀처럼 시간과 공간 배경을 설명하는 제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긴 시간 프랑스에서 유학한 작가는 누벨바그 작품을 포함한 작가주의 영화들과 그 미장센에 적지않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 교본과 문법으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인간을 드러냄으로서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 이러한 태도는 초기 작업과 근작을 따지지 않고 고르게 나타난다.
“초창기에 영상과 회화를 병행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회화가 기록하는 단일하고 시적인 순간, 서사를 전달하는 영상 기록이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었죠. 이런 시도는 최근에 이르러 회화 안에서 서사를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적인 미장센을 연출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영상과 회화, 두 매체로 나누어 표현하려 했던 과제를 오로지 회화 안에서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물위의 불빛들 Lights on the Water] 18분 9초, 단채널 영상(컬러), 2011

그림을 그리는 건 꽤 벅찬 일입니다. 언젠가는 조금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식, 특히 영화의 구체적 서사로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쩌면 극영화가 될 수도 있겠지요. 화가인 만큼  좀 더 섬세하게 영화를 연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각 예술이고,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은 서사 외에도 다양하니까요.


다만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빛의 성질이다. 40대에 접어든 서 작가는 이제 적극적으로 그림 속에 자연광을 끌어들인다. 누워있는 남자들의 어둡고 황폐한 방, 커튼과 문을 비집고 드는 우직한 햇빛을. 거기엔 어떤 대단한 사건도 없지만, 우리는 이미 적지 않은 단서를 감춘 공기와 드라마가 그 안에 있다는 걸 몸으로 안다. 익히 알고 있는 감정에 공명하는 신체적 신호랄까. 공공장소에서 사적인 경험을 마주하게 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서 작가의 그림에서도 우리는 우두커니 홀로 있는, 흐린 눈빛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기호를 읽어낸다. 이는 보는 이뿐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경험을 그림 안에서 조영하려는 처절한 시도다. 눈이 아닌 온몸과 오감으로 그림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푼크툼(Punctum). 작품은 객관화된 그림 속 인물에게서 주관적인 경험과 공감을 끌어내는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여전히 캔버스는 안팎의 감정을 뒤쫓는 화가의 사냥터요, 가장 취약한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추격이 이어진다. 


[S# 저녁-보형의 거실-소파위 S# Evening–Bohyung’s Living Room-on Sofa] 53x72.7cm, 캔버스에 유채, 2011

늦은 밤 집에 돌아와 TV 앞 소파에 누워 아무 생각없이 리모컨을 돌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바로 누워있죠. 오늘도 힘든 하루였으니까요. 보시다시피 제 그림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림을 보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죠. 당연하겠지만, 그 속엔 제 모습도 함께 투영돼 있습니다.



효율에 대한, 비효율의 투쟁


서 작가의 그림 속엔 그만의 인장이 숨어 있다. 더 좁게 말하면 사람의 흔적이 있다. 그는 일부러 붓끝이 세세하게 쓸어간 궤적을 화폭에 고스란히 남겨둔다. 사람 손만이 가능한 공정을 통해 그림만이 가능한 길을 찾는 지난한 여정.

“유화에서 자주 쓰이는 '글레이징'(Glazing)은 밝은 부분을 연속해서 겹쳐 칠하는 기법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에 한 부분을 그려서 완성하는 방식을 택했죠. 그 결과 푸석한 질감이 강조된 느낌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의도적으로 붓질의 흔적을 남겨놓는 것이었습니다. 글레이징을 하다 보면 앞서 그린 붓자국이 전부 뭉개지고, 결국 제가 그리려던 대상은 이미지의 형태로 남게 되니까요. 저는 제가 다루고 있는 재료가 결국 물질이라는 것,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화가의 육체적 생동감까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좀 더 회화적인 표현을요.”



한때 “모든 이미지의 유일한 본보기”였던 회화는 이제 무수하고 다양한 이미지와 기호들과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잘 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생성되는 디지털 사진에 비해 회화는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느리고 지루하며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다는 걸. 이토록 고되고 비효율적인 시도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서 작가는 몇 번이고 스스로 곱씹어 묻는다.

“2013년 개인전 <회화의 기술> 이후 저는 회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회화의 예술성은 작가의 노력과 훈련을 통한 육화된 기술에 의해 발휘되는 것이기에 독창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작업하는 동안엔 다른 일에서는 좀체 겪기 힘들만큼 집중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회화를 작업하는 작가라면, 이 시대에 회화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겠죠.”


[JB] 80.3x100cm, 캔버스에 유채, 2013

저수지 낚시터를 배경으로 한 영상 '물 위의 불빛들'이라는 작품을 촬영할 때 같이 준비했던 작품이에요. 어느 한가한 오후, 물 위에 떠 있는 방갈로에 한 남자가 누워있는 모습을 표현한 거죠. 낚시터를 간다고 하면 물론 물고기를 낚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이렇게 조용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참 보기 좋고, 부럽더라고요.


모든 효율의 총합에 대적하는 비효율의 투지. 분명 이것은 서 작가만이 혼자 싸워야 이겨야 할 싸움은 아닐 것이다. 기술이 가장 빠르고 쾌적한 도로로 세상을 인도할 동안, 예술은 지금껏 그래왔듯 계속해서 느리고 미련하게 거칠고 험준한 산을 돌아갈 것이다. 그 길이 형용할 수 없이 아둔하고, 소스라칠 정도로 무모하며, 온전히 쓸모없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해도.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서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