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초록이 품은 주술

에디터 고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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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니 작가


인류 문명이 소멸한 땅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여러 아포칼립스 영화들이 풀과 식물로 뒤덮인 도시와 건물 폐허를 상상한다. 이처럼 자연은 마지막에 승리한다. 한때 포식자와 위정자가 필멸한 곳, 생명의 부재가 발생한 곳에선 언제나 풀 한 포기가 먼저 고개를 든다. 김지니 작가도 아마 그 불가해한 힘에 끌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고 찰나에 그치더라도 언제나 자연이라는 근원만큼은 건재하다는 사실. 식물이 가진 녹색은 어떤 원초적인 안도감을 우리에게 전한다.


[들리지 않는 그러한 것들] 60.6x45cm, 장지에 채색, 2019


그 부재는 일면 쓸쓸하지만, 결코 황량하지 않다. 창문과 테라스를 비집고 나온 화초도, 산뜻한 컬러를 입은 건물 곳곳에 푸릇하게 돋은 수풀도. 김지니 작가는 사람이 살던 공간을 식물이 점거한 풍경을 그린다. 화폭 안의 식물들은 비단 환경의 일부분이 아닌,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주거하던 원주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 부재는 그림을 바라보는 이를 위해 마련된 빈 의자일 수도 있다. 쳇바퀴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탈진한 이들을 초대해 쉬게 하고 위로하기 위한.
“현대인의 삶은 대개 틀에 박혀 있죠. 단지 삭막한 도시 공간에 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관계 속에서 늘 억눌리며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가끔은 저 역시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도피하고 싶어져요. 아무도 서로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온전히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요.”

  

[자연, 비춰지다] 80x50cm, 장지에 채색, 2018


[자연, 들어오다] 91x60cm, 장지에 채색, 2018


작품은 언뜻 서양화의 원근법을 사용한 수채화처럼 보이지만, 흥미롭게도 김 작가는 한국화(동양화)를 전공했다. 전통 닥종이에 아교와 물로 희석한 분채(흙에서 정제한 동양화 물감)로 채색한 그림은 퍽 낯설되 경쾌한 리듬감을 준다. 소리없이 돋는 풀처럼, 그림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앞에 오래 머물며 곳곳을 정성 들여 살피게 하는 미묘한 힘을 가졌다. 김 작가의 소탈한 바람에 걸맞는 크기와 위력으로.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안식처를 줄 수 있는, 대자연 같은 작업을 해나가고 싶어요. 당장 우리의 현실에 가져다 놓을 순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몸과 마음 곳곳에 평온함이 퍼지는 그런 풍경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으로나마 파릇파릇한 수풀이 우거진 풍경을 바라보며, 바쁜 현대인들도 자연의 운치를 느끼고 휴식할 수 있게.”

  

[그들이 사는 곳] 75x40cm, 장지에 채색, 2018


[넘어보는 세상] 75x40cm, 장지에 채색, 2018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산수화를 즐기고 사랑했던 이유는 어떤 주술적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자연만이 줄 수 있고, 자연만이 행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위엄과 기운을 붙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어찌 보면 김지니 작가는 '현대인을 위한 산수화'를 슥슥 그려나갔던 건지 모른다. 매일 출근길에 보던 가로수 풍경 같아도, 돌아보면 언제든 마음을 두고 또 뉘일 수 있는 푸르고 영원한 정처를.

[스며들다] 75x40cm, 장지에 채색, 2017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김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