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우아한 계획, 치밀한 미술

에디터 고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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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작가



종종 예술가의 작업은 내면의 본능을 풀어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표현을 향한 생리적인 투지. 그것은 대개 거칠고 날이 서 있고, 때때로 격정적이며 추상적이다. 반면 체계를 중시하는 부류도 있다. 마치 건축가처럼 현실을 측량하고 상상의 견적을 내며 비전의 토대를 세우는 이들. 박준석 작가의 작업은 후자에 보다 더 가깝다. 아름다움과 본질을 좇는 길은 같아도, 다만 이 여정은 온전히 통제와 설계의 지붕 아래 이루어진다.


흑과 백의 미묘한 대치. 그 경계에는 늘 은근한 긴장이 도사린다. 우리가 흔히 보는 거의 모든 사물에 존재하지만, 결코 이웃할 수 없는 한 쌍의 색채. 옵티컬 아트(Optical Art, 기하학적 형태, 색채의 장력 등을 이용해 시각적인 교란과 흥미를 일으키는 미술 장르)와 미니멀 아트의 영향을 받아 회화와 판화, 설치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박준석 작가에게 흑백의 그리드(Grid, 격자 형태)는 더없이 적합한 안료이자 자재다. 작가는 흡사 네모난 블럭을 쌓듯 사물의 겉과 속, 빛과 그림자, 평면과 입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두루 담으며 그 본성을 탐구한다.

 72.7x5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


 100x4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박 작가에게 그리드의 의미는 남다르다. “사물이나 공간을 구성하고 표현할 때 그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빛은 반드시 어둠을 만들고, 나아가 사물의 색과 물성을 소개한다. 이를 조정하고 병렬하면서 박 작가는 사물 하나하나를 저만의 방식으로 해석해간다. 이미지는 테이핑(벽면에 라인 테이프 등을 붙여 작업하는 것)을 거쳐 캔버스를 넘어 선반까지 확장되고, 나중에는 전시장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작품의 사진보다 실물이, 이미지보다 전시 자체가 더 흥미로운 이유다.

박준석 작가의 전시회 전경

박준석 작가의 전시회 전경


그는 정물을 그리는 작가다. 정확히는 ‘정물과 공간의 관계’를 다룬다. 정물화의 단골 소재인 과일 바구니, 컵 따위부터 노트북, 스마트폰 같은 전자 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물을 소재로 삼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 작가 나름의 선별이 느껴진다.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변용되는 사물들에 눈길이 가요. 가령 머그컵은 원래 음료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경우에 따라 꽃병이 될 수도, 워머나 캔들이 될 수도 있죠.”

 40.9x31.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


공정에는 보기보다 적지 않은 공력이 든다. 마치 컴퓨터로 스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이미지들이 사실상 완전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오브제를 촬영하고 이를 CG 도면으로 옮긴다고 해도, 결국 작품을 마무리짓는 건 사람의 수고로운 손이다.

“컴퓨터로 작업한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거랑 물감을 바른 거랑 느낌이 같을 수는 없어요. 사람 손을 거친 편이 보다 ‘덜 딱딱해’ 보이거든요. 내가 의도한 대로 계획하고 그게 그대로 결과물에 반영되기에. 우연의 개입이 없다고 할까요. 사람 손으로도 작업해도 디지털 작업보다 더 깔끔하게 결과물이 잘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22x27.3cm, 캔버스에 아크릴, 2019


치밀한 작업은 주인을 쏙 빼닮았다. 전시 기획 단계부터 전시장 공간의 도면을 실측하고, 늘 작업실의 온도와 습도를 칼같이 유지하는 박 작가의 긍정적인 강박이 반영된 결과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하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해요. (미술 작가가) 눈으로 이목을 끌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인 만큼, ‘어떻게 보여줄지’를 끝없이 고민하는 건 아마도 작가의 숙명 같아요. 내가 만든 작품이 책임감 없는 배설, 나 혼자 보는 일기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60.5x40.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9


박준석 작가의 고민은 이제 작품을 넘어서 있다. 재능 기부 등으로 지역 공동체와 꾸준히 협업해온 그는 현대인의 삶과 그늘을 기록하는 데도 여전히 관심이 많다. 작품 속 정물들이 다분히 시대를 반영하듯 동시대와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기여하는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박 작가는 덤덤하게 바란다.

예술에 있어 '계획'의 가장 신나고 멋진 점은 어떤 대단한 마스터플랜이나 작가적 야망, 예술적 영감의 충동이 없더라도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일을 착착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일 테다. 어쩌면 충분히 고민하되 주저하지 않는 성향이야말로 그동안 박 작가를 온전히 작품에 매진하게 했던 동력일지 모른다. 계획의 첫 발을 떼고 난 그 다음엔? 그저 계속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일이다. 머릿 속으로 계획한 바를 실천에 옮기는 것, 노력의 대가를 정직하게 보상하는 건 예술과 노동이 달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느 곳에나 간단하고 명쾌하게 적용될 것이다. 우직한 손과 예리한 눈으로.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박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