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빗길 위의 수행자

에디터 고석희
2019-10-17
임지범 작가


수면은 정직하다. 그 어떤 편견 없이 언제나 제 바깥의 물체와 풍경을 오롯이 담아내기에. 비오는 날이면 임지범 작가는 거리로 나가 젖은 빗길을 사진에 담고, 그림으로 옮긴다.  땅에 괸 빗물 속에 비친 반상은 우리가 발 딛은 현실보다 좀 더 특별하고, 어쩐지 더 드라마틱하다. 그 속에는 작가가 당시 느낀 감각과 느낌이 그대로 점착돼 있다. 누구나 알고 꿈꾸지만, 살아가며 쉬이 잊고 살기 쉬운 감상들이 말없이 캔버스를 적시는 지금.


빗발에 촉촉이 젖어든 땅의 질감, 그 속에 비친 하늘과 불빛의 풍경이 몹시 리얼하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현실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묘사보다, 작가의 감성과 터치를 이용해 모사한 현실의 다른 버전에 더 가깝다. 마치 물에 비친 반상 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는 수면의 궤적을 더하듯. 오리지널의 복제물이 다시금 빚어낸 신기루는 곧 우리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진솔한 대답이다. “초기에는 (빗물에) 사람이 비친 이미지들을 위주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특정한 사물보다는 물 위에 비친 전체 풍경의 분위기나, 빗물에 비친 반상과 빗물이 고이지 않은 바닥면의 조화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더라고요.”

<그 길을 걷다가> 캔버스에 유채, 60x73cm, 2016


스친 바람에 금방이라도 일렁일 듯 리얼하지만 그 중심에 온갖 추상적인 세계를 담고 있는 이 수면은 마치 관객이 그림을 바라볼 때 느끼는 아득함을 물결에 실어 전한다. 이 그림들은 결코 있는 그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주 잠깐이라도 현장에서 손쉽게 내려지는, 즉흥적인 해석을 유보해야 하는 이유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고 다시 찬찬히 보더라도, 여전히 입안에 남은 말이 이물감처럼 서걱거릴지 모른다. 판단을 멈추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 정적을 연료 삼아 우리는 다시 그림을 볼 수 있다.

<설레이는 발걸음> 캔버스에 유채, 61x73cm, 2017

<스쳐 지나간 1년> 캔버스에 유채, 33x53cm, 2015


다만 실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빗물에 번진 듯 호쾌하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색감이다. 이것은 당시 비오는 거리를 누비며 느꼈던 임 작가의 기분이 다분히 녹아 들어간 결과물이다. “특별하게 선호하는 색은 없지만 대체로 몽롱하고 흐릿한 색감으로 작업하는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현실과는 조금 다른, 뿌옇고 흐릿하며 서정적인 세상이 있어요. 비가 내려야만 보이는 세상.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내게는 꽤 몽환적으로 다가오죠. 빗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비로소 제가 속한 현실과 제가 꿈꾸는 판타지가 서로 소통합니다. 세상의 여러 고민들을 떠나, 제가 마음을 쉬고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지죠.”

<구슬프게> 캔버스에 유채, 60x73cm, 2015

물에 비친 반상을 그리는 건 어찌 보면 자기 내면에 대한 응시처럼 느껴진다. 비록 괴인 빗물의 수면은 낮아도, 그 속엔 형형색색의 감정과 욕망이 있다. 이것들이 각자 내는 소리는 무척 소란하고 화려하지만, 작가는 잠잠히 빗속을 거닐며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며, 마침내 돌아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한다. 빗길은 작가에게 앞으로도 그리고 오랫동안 성찰의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오후, 잦아든 빗방울> 캔버스에 유채, 53x33cm, 2014


에디터 고석희
seokhee@gongshall.com
사진 제공 임지범